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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산의 이유
    THOUGHTS 2021. 1. 11. 16:30

    내가 어릴 때 살던 집 뒤에는 초등학교 교가에 등장하는 낮은 봉이 있다. 산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아주 낮은 봉. 그 산의 정기를 받아 무럭무럭 자란 나는 500m도 안되는 그 곳에 오르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1월 1일에 그 산에 오르면 노오란 계란 지단과 바삭한 김이 가득 올라간 떡국을 주는데도 가기 싫어했다. 새해 첫 날부터 새벽녘에 아빠는 늘 잠자는 나를 억지로 깨워 그 산에 올라갔다. 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겨우 따라 올라갔다. 그렇다. 나는 산에 가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이런 내가 요즘 인스타그램 피드에 풀과 나무로 가득한 산 속에 있는 사진만 잔뜩 올린다. 왜 이 맛을 진작 몰랐을까. 산이 좋아 캠핑이라는 취미가 더욱 좋아졌다. 사실 캠핑의 진짜배기는 백패킹이다. 산 속에서 하룻밤 자고 일어났을 때 공기가 주는 촉감과, 이슬맺힌 풀들이 주는 냄새는 백패킹에 중독되게 만든다.

    이런 나에게 요즘 산에 왜 다니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생겨 정리해본다.

    산은 머릿속을 비워준다. 얼굴은 뜨거워지고, 허벅지 근육은 부풀어오르고, 발가락은 저리고. 땀이 눈물인지 눈물이 땀인지 헷갈릴만큼 시간이 흐른다. 걷고 잡고 타고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눈 앞에 있는 흙, 바위, 땅에 집중하게 된다.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복잡한 머릿속이 깨끗해진다. 정상즈음 도달하면 산에 오르기 시작했을 때는 비워져있다. 내 머릿속을 미친듯이 지배하고 있던 그 고민하던게 무엇이었지? 사실은 별거 아니네. 잠시나마 잊게된다.

    산은 끝이 있다. 산에 오르기 시작하는 것은 정상이라는 끝이 있다는 것. 정상에서 내려가기 시작한다는 것은 땅이라는 끝이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중간에 포기할 수가 없다. 일단 시작하면 끝을 봐야한다. 시작하면 끝이라는 것을 도통 보지 못하는 내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취미다.

    다음은 있어보이고 조금 거창한 이유다. 산은 내 존재가치에 대한 의문을 던져준다. 산을 오르다보면 수많은 생명을 만난다. 즈려밟기도, 스치기도, 깔고 앉기도 할 이름 모를 풀과 나무. 흐르는 계곡물에 퍼덕이는 이름 모를 물고기. 조금은 짜증날 정도로 귀에서 앵앵대며 풀과 풀 사이를 자유롭게 날라다니는 모기와 날벌레들. 보기에 귀엽고 신기한 포유류들 -다람쥐, 사슴-부터 만나면 오금 지려 움직이지도 못할 산양과 멧돼지까지. 수많은 생명들이 본인의 삶의 터전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 최선들이 모여 조화를 이루고, 땅에서 보지 못한 장관을 만들어 낼 때 비로소 내 존재 가치에 의문이 든다. 결국 인간도 이런 자연 안에서는 한낱 미물인데 왜 그렇게 나는 아등바등 살고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을까. 뭘 위해 어떤 것들을 포기하고 살고 있는 걸까.

    오글거리지만 인생이란 무엇일까도 생각해보게 된다. 산은 ㅅ 이렇게 생겨서 “산”인거 같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ㅅ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수 백, 수천개의 능선과 봉을 지나야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열심히 오르고 있지만 사실 내리막이기도 하고, 내려가고 있지만 오르막이기도 하다. 산 속에 있는 나는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대략 100세 인생에서 지금이 오르막인지 내리막인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내 인생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산이 아니고 능선 하나 없는 드넓은 평야일 수도 있다.

    혼자 산에 가면 심심하지 않냐고요. 산은 생각할 거리가 정말 많답니다.
    이제 몇 년뒤에 발차기 할 글은 끝이 났습니다. 누가보면 거의 산마니인줄 알겠지만 여러분처럼 방금 전에 등산을 시작한 초보라는 것이 아주 민망한 사실이죠. 내년에는 조금 더 고수가 되어 이 글을 보고 비웃는 내가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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